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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글이 있어서 공유하도록 한다.
출처 : https://brunch.co.kr/@kklloop/6
2017년, 박창선님께서 이른바 '넵'병을 세상에 소개해주셨다. 넵병은 '을'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갑'에게 대답할 때 자기도 모르게 '넵'을 타이핑하게 되는 슬픈 현상을 의미한다. 넵병은 아직 뚜렷한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아 지금도 우리 주변에 창궐하고 있다.
우리 회사 슬랙에 '넵'을 검색해보았다. 16k results...
나는 2017년 당시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대학원생은 교수라는 '슈퍼갑'을 상대해야 하는 '슈퍼을'이다. 그렇다 보니 내 몸에서도 자연스레 넵병이 발병하게 되었다. 어디서 옮아왔는지 모르겠다. 아직 치료 중이다.
자고로 병은 원인을 알아야 고칠 수 있지 않는가. 그래서 그 당시 나랑 같은 연구실 소속의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박사과정 우웅몬 누나(당시 석사과정)와 함께 넵병의 발병 원인을 분석하는 쓸데없이 진지한 연구를 해보기로 했다.
1단계 : 넵에는 오만가지 감정이 들어있다.
우리네 '을'은 넵을 통해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일까. 넵병은 도대체 왜 발병하는 것인가.
우리는 20-30대에 속하는 21명이 참가자에게 특정 상황을 던져주고 그 상황에 어떻게 답을 할 것 같은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본인의 감정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Q. 다음과 같은 상사의 말에 자연스럽게 답해보시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본인의 감정을 말해보시오.
상사 : 해성님 이거 내일까지 정리해서 보내주세요 ^^
해성 : ( )
주어진 상황에 따라, 참가자의 성격에 따라 정말 다양한 넵 시리즈가 나왔다.
1단계 실험의 결과. 인간은 무려 14가지 감정을 넵을 조금씩 바꿔가며 표현할 수 있다.
난 교수님께 무언가 깨달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아하 넵넵]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갑에게 [뉘예뉘예]를 날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 분의 사회생활이 심히 걱정되었다.
넵 시리즈에서 느껴지는 14가지 감정을 뽑아봤지만 우리는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 우리 '을'들은 이렇게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며 사는 생명체가 아니다. 14가지 감정을 관통하는, '을'이 전달하고자 하는 더욱 원초적이고 절실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25명의 참가자를 대상으로 총 25개의 ‘네’ 유형에 대해 14가지의 감성이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는지 평가를 진행하였다. 실험 결과를 토대로 14 가지 감성의 잠재 변수를 뽑아내기 위한 Factor Analysis을 수행하였다. Factor 추출은 고윳값 1.0 이상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Varimax 회전을 이용하였다. 이런 거 다 필요 없고.
어쨌든 한 번 더 분석을 해보니 '을'들이 넵을 통해 '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은 결국 이 두 가지였다.
자발성 : 저는 그 일을 당신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습니다.
예의바름 : 당신이 갑이라는 것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분석하다가 울 뻔했다.
2단계 : 넵에 들어있는 감정은 이것이 결정한다.
1단계 실험에서 넵 시리즈에 어떤 감정들이 담겨있는지를 분석해보았다면, 그다음 단계에서는 그 감정들을 결정짓는 요소가 무엇일지 분석해보았다.
넵 시리즈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바꾸는 요소들
분석을 해보니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넵 시리즈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1. 네의 개수 : 네, 네네
2. 네의 받침 : 네, 넵, 넷, 넴, 넹
3. 문장부호의 종류와 개수 : 네. 네! 네; 네...
4. 히읗과 키읔의 종류와 개수 : 네ㅋ, 네ㅋㅋ, 네ㅎ, 네ㅎㅎ
우리는 이 구성 요소들을 골고루 조합한 넵 시리즈를 제작하여 3단계로 넘어갔다.
3단계 : 공손하고 자발적으로 보이는 방법.
이제 연구의 마지막 단계이다. 우리가 '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이 자발성과 예의바름이라면, 우리는 각 구성 요소들을 어떻게 조합해야 하는가. 즉, 우리가 채팅창에 쳐야 하는 말은 결국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20명의 참가자를 대상으로 위에서 조합한 넵 시리즈가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떻게 느껴지는지 물어보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참가자가 이른바 넵 맵(Map) 위에 각각의 넵 시리즈를 위치시켜보도록 했다.
넵 맵
우웅몬과 함께 결과를 또 열심히 분석했다. 몇 가지 인사이트를 소개한다.
인사이트 1 : [넵]만 써도 중간은 간다.
혹시 직장생활에서 당신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가 '무난함'이라면 [넵]을 적극 추천한다.
[넵]만 달랑 보내는 사람들과 이를 받는 사람들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넵]을 통해 주고받는 감정은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
고생을 사서 하지는 않지만 일을 주면 또 잘하는 나의 무난함을 적당히 예의 바르게 표현하고 싶다 ㅎㅎㅎ
그려지지 않는가. 저 감정이 '갑'에게 그대로 전달되기만 한다면 딱 적당한 '을'이 되어 딱 적당한 직장생활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최고의 활용도.
역시 넵병이 생긴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중간만 하고 싶은 '을', 그리고 역시 그가 적당히 중간만 해주기를 바라는 '갑'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역사의 산물이랄까.
인사이트 2 : 위기의 순간엔 [넵넵!]을 써라.
갑에게 슬슬 당신의 충성심을 어필해야 하는 타이밍이 왔는가. 그렇다면 [넵넵!]을 적극 추천한다.
분석 결과, [넵넵!]은 모든 넵 시리즈 중에 가장 자발적이고 예의 바른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는 놈이었다. 게다가 [넵넵!]을 받는 사람은 더욱 자발적이고 예의 바른 느낌을 받는다! 실험에 참가한 한 참가자에게 [넵넵!]이 이렇게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저를 위해 누군가가 [넵]을 두 번이나 치고 문장 부호까지 작성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한다는 건... 엄청난 거죠...(아련)
(저게 그렇게 엄청난 일인가 싶지만) 어쨌든 적재적소에 [넵넵!]을 활용하면 생각보다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다만 너무 자주 활용하면 유노윤호로 오해받아 당신에게 회사의 모든 일이 쏟아질 수 있다.
인사이트 3 : [네.] 쓰지 마세요. 난리 납니다.
혹시 당신에게 맞춤법 결벽증이 있더라도 [네.]는 쓰지 않는 것이 좋을듯하다.
[네.]와 [네]는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이 전혀 다르다. [네.]와 [네]를 보내는 사람은 적당히 예의 바르다고 생각하고 보내지만, 받는 사람은 그와 반대로 무례하다고 느낀다. 실험에 참가한 한 참가자는 [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건 싸우자는 거죠 ㅎㅎㅎ
인사이트 4 : 상황에 따라 골라 쓰세요.
혹시 당신이 좀 더 미묘한 감정까지 컨트롤하기 원한다면 아래의 넵 맵을 참고 하길 바란다. 메시지를 받는 사람 입장에서의 넵 맵이다.
결론 : 쓸데없이 진지한 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
참고사항 1 :본 연구는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연구방법론 수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참고사항 2 : 나와 우웅몬은 이 연구를 CHI라는 세계적인 학회에 제출하였다. 당연히 accept은 안 됐다. 리뷰어들의 반려 사유는 주로 '니네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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